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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가이드 라인 ② 상대방과의 기록 삭제하지 않기

원문https://www.nbntv.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20994 (새 창)

장예준-변호사-인터뷰-썸네일

성범죄 사건에서 증거는 물리적 흔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건 이후 당사자 간에 오간 메시지와 통화 기록 등 디지털 자료 역시 수사의 핵심 자료로 활용된다. 초기 대응 방식에 따라 사건 전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 보존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전 칼럼에서는 성범죄 피해 직후 본능을 거슬러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인 '신체적 증거 보존'에 대해 말씀드렸다.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수사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의 대상이 되며, 실무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문제가 발생하는 두 번째 쟁점, '가해자와의 디지털 기록 보존'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성범죄 사건의 특성상 밀폐된 공간에서 발생하여 명백한 CCTV나 목격자 등 직접 증거가 없는 경우는 지극히 일반적이다. 객관적 물증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불리한 것은 아니며,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정황 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사건을 풀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상담실에서 마주하는 가장 안타깝고 난감한 순간은, 피해자가 가해자와 나눈 메신저 대화나 통화 기록 등을 이미 '전부 삭제'하고 오셨을 때이다.

수사기관은 당사자 간 디지털 기록을 주요 정황 증거로 본다. 대화 내용과 시간, 맥락은 사건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관련 자료가 없을 경우 진술 외 입증 수단이 제한될 수 있다.

당사자간 기록을 삭제한 부분에 대하여 수사기관은 물론, 제3자의 상식적인 시선에서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법하다. 그러나 경험상 절반 이상의 피해자분들이 가해자와의 흔적을 모두 지운 채 사무실을 방문한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의 심리적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1차원적인 시각에 불과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기록을 삭제하는 것은 어떻게든 이 끔찍한 사건을 없던 일로 치부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보려는 뇌의 절박한 방어 기제이자 생존 전략이다.

휴대전화를 켤 때마다 눈에 띄는 가해자의 이름과 대화창은, 그 자체로 사건 당일의 악몽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는 강력한 트리거가 된다. 당장 누군가를 고소하고 법적 다툼을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숨 막히는 현실을 끊어내기 위해 눈앞의 흔적부터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삭제 행위는 이후 법적 공방에서 쟁점으로 이어진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의 기록 삭제를 근거로 진술 신빙성을 문제 삼거나, 의도적인 증거 인멸 가능성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가해자 측이 이러한 피해자의 절박한 심리 상태와 행동을 법정에서 교묘하게 악용한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사건 이후 기록을 삭제하거나 대화방을 나간 정황을 가리켜, "진짜 억울한 피해자라면 증거를 모아야지 왜 삭제를 하느냐",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으니 의도적으로 인멸한 것 아니냐"며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건 직후의 판단이 시간이 지나 법적 대응으로 이어질 경우, 삭제된 기록은 복구가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특히 가해자 측에만 일부 기록이 남아 있을 경우 전체 맥락이 왜곡된 상태로 제출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사건 직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잊히겠지", "내 평생 절대 고소하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다짐했던 본인의 결심을 맹신해서는 안된다. 억눌렀던 상처는 곪아갈 뿐 결코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결국 견디다 못해 뒤늦게 용기를 내어 법의 문을 두드렸을 때 가장 뼈아프게 발목을 잡는 것은 가해자의 휴대전화에는 남아있고, 내 휴대전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편화된 기록들이다.

전체적인 맥락이 철저히 거세된 채, 가해자에게만 유리하게 편집되고 발췌된 기록만이 수사기관에 제출되는 가장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기록의 법적 의미와 증거 가치는 전문가 판단 영역에 속한다. 일반인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자료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반대로 유리하다고 생각한 자료가 한계를 가질 수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증거의 법적 가치를 평가하고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수많은 사건의 진술과 정황을 분석해 온 법률 전문가의 몫이라는 점이다.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나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사건 전후의 대화나 호의적인 태도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반면, 나에게 유리하다고 굳게 믿었던 자료가 법리적으로는 뜻밖의 맹점을 안고 있을 수도 있다.

사건 초기에는 관련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후 자료의 활용 여부와 법적 평가는 전문가 검토를 통해 진행된다.

그러니 향후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사건 초기에는, 단 하나의 기록도 지우지 말고 날 것 그대로 보존하시기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리고 해당 자료에 대한 법적 평가는 온전히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당신이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그날의 진짜 이야기는 법의 언어로 다투되, 당사자는 고소 이후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는 데에만 전념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무법인 성지파트너스 장예준 파트너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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